기후변화로 인해 사라진 ‘논두렁 물길’의 정서

justice0121 2025. 11. 6. 19:59

기후변화와 가뭄으로 논두렁 물길이 사라지고 있다.
물이 멈추자 농촌의 소리와 정서도 사라졌다.
흐르는 물과 함께했던 한국 농촌의 감성을 돌아본다.

한때 한국의 농촌에는 논마다 물길이 있었다.
봄이면 논두렁 사이로 물이 졸졸 흘렀고,
그 물길을 따라 개구리 울음이 번졌다.기후변화로 인해 사라진 ‘논두렁 물길’의 정서

물길이 끊기자, 농촌의 정서도 함께 메말라 갔다.

H2. 논두렁 물길의 의미 — 생명과 감정이 흐르던 통로

논두렁의 물길은 단순한 배수로가 아니었다.
그곳은 생명과 사람이 함께 숨 쉬던 공간이었다.
농부는 그 물길의 수위를 보며 하늘의 기분을 읽었다.

물이 많으면 풍년의 기운이 돌고,
물이 마르면 가뭄을 걱정했다.
아이들은 장화를 벗고 물속에서 미꾸라지를 잡았고,
어른들은 논두렁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쉬었다.

그 물길은 사람과 자연을 연결하는 감정의 통로였다.
그러나 이제 그 길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기후가 달라지고, 물의 순환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봄은 일정한 비로 시작되었다.
봄비가 내리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자연스럽게 논두렁을 채웠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비는 오지 않거나 한꺼번에 쏟아진다.
짧은 시간 동안 내린 폭우는
물길을 채우지 않고, 그대로 쓸려 내려간다.
그 결과, 논두렁은 항상 마르거나
반대로 잠시 홍수가 되어버린다.

이 극단적인 변화가 전통적인 물의 리듬을 무너뜨렸다.
물이 흐르지 않으니, 논의 생명도 흐르지 않는다.

봄철 가뭄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논두렁의 물길은 비가 오지 않으면
한 달 넘게 마른다.

예전에는 지하수나 산물(山水)이
자연스럽게 물길을 채워주었지만,
이제는 그 수원도 줄어들었다.
농부들은 양수기를 돌려 억지로 물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인공의 물은
자연의 리듬을 따라 흐르지 않는다.

흙은 수분을 머금지 못하고 금세 갈라진다.
기후의 변화는 땅의 표정까지 바꾸었다.
논두렁의 초록빛이 사라지고,
흙빛의 고요함만 남았다.

논두렁의 물길은 수많은 생명들의 터전이었다.
개구리, 미꾸라지, 잠자리, 물방개, 논우렁이….
이들은 그 작은 물길을 따라 살았다.

그러나 물이 마르자
그 생명들도 함께 사라졌다.봄밤의 개구리 합창은 들리지 않고,
잠자리의 그림자도 줄었다.

물의 부재는 곧 생명의 부재다.
생태계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마을의 정서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농부에게 물길은 단순한 농사 도구가 아니라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논은 살아 움직였고,
그 소리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요즘 농부는 물을 기다리지 않는다.
날짜를 정해 관개수를 틀고,
정해진 시간에 물을 끊는다.
물길이 아니라, 파이프가 농사의 중심이 되었다.
한 전남 나주의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물소리만 들어도 살 것 같았는데
요즘은 물이 돌아도 정이 안 갑니다.”
농사에서 ‘감정’이 사라졌다는 말은,
논두렁 물길이 끊겼다는 뜻과 같다.

논두렁에서 물이 흐르던 시절,
마을은 항상 소리를 품고 있었다.
물소리, 개구리 울음, 새의 지저귐.
이 소리들이 어우러져
농촌의 하루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제 마을은 너무 조용하다.
바람이 불어도 먼지만 일고,
밤에는 개구리 대신 냉장고 소리가 들린다.
이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사라진 리듬의 공허함이다.
기후변화는 사람의 귀에서 계절의 음악을 빼앗았다.

논두렁 물길은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물이 돌면 모두 함께 논두렁을 점검하고,
새 물길을 내며 웃었다.

그 과정에서 나누던 대화와 웃음은
농촌 공동체의 온기였다.
하지만 이제 각자의 밭에 각자의 펌프만 남았다.
물의 연결이 끊기자
사람의 연결도 약해졌다.

예전처럼 “물 좀 나눠 달라”는 말도 사라지고,
마을은 조용한 개인의 공간으로 변했다.
물길의 부재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전통 농법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지자체와 환경단체가 협력하여
논두렁 물길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물의 순환을 살리고,
비가 왔을 때 흘러가는 빗물을 저장해
다시 농사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시도는 단순히 농업의 회복이 아니라
정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흐르는 물이 돌아오면,
그 물과 함께 사람의 웃음도 돌아올 것이다.

논두렁의 물길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람과 땅,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만나는 자리였다.
그 물길은 계절의 소리를 전하고,
사람의 마음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물길이 사라지자
농촌은 조용해지고, 정서는 메말랐다.

물이 사라진 곳에는 삶의 여운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수자원이 아니라
물과 함께 흘렀던 감정의 시간이다.

언젠가 다시 논두렁에 물이 돌아와
햇빛 아래 반짝이는 그 풍경을 볼 수 있기를,
그것이 이 시대 농촌이 바라는 가장 순수한 희망이다.